구원론 교정.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so that we do not drift away.
ORACLE[2030]
2020. 9. 19. 19:27
히브리서 2장 1~ 4절: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We must pay more careful attention, therefore, to what we have heard, so that we do not drift away).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 For if the message spoken by angels was binding, and every violation and disobedience received its just punishment),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how shall we escape if we ignore such a great salvation?)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This salvation, which was first announced by the Lord, was confirmed to us by those who heard him).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으로써 그들과 함께 증언하였느니라. . (God also testified to it by signs, wonders and various miracles, and gifts of the Holy Spirit distributed according to his will. )
1. 양극단: 신 할례당과 영지주의.
사도들과 사도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기반으로 세운 초대 교회의 상황에서 나온 대표적인 이단적인 복음이 바로 신 할례당과 영지주의가 되겠습니다. 구약 율법의 제사 의식과 행위 율법이 모두 폐하여졌는데도 다시 모세의 법도 지키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도 함께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 자들이 신 할례당이었고, 그와는 반대로 예수 보혈의 공로로 인해 인간의 모든 죄(과거, 현재, 미래)가 사함받았기 때문에 아직 속죄가 이루어지지 않은 육체로 범하는 죄악으로는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가르치면서 나아갔던 것이 영지주의(니골라당)입니다.
(1) 정통교회의 구원파적인 구원론.
예수님 피의 공로로 인해 "의롭다" 칭함을 받은 존재들이 바로 성도들이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행위와 각종 종교적 의식으로는 구원에 이르는 길을 열어놓지 않았으며, 오직 예수 이름으로 구원을 받게 됩니다.
문제는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의 피를 드림으로 구약 성전의 휘장이 찢긴 것과 같이 구약의 율법이 폐해졌는데도, 다시 구약 모세의 희생 제물 의식과 행위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현재 존재하는 제칠*안식일교와 그곳에서 나온 하나*의 교회와 같은 구약의 절기와 무교병을 먹는 무교절 의식을 지키는 이단 종파입니다.
그와는 다르게 예수 보혈의 공로는 인간의 모든 죄악을 속량하였기 때문에 더이상 육체와 생각으로 짓는 죄로는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고 가르치는 것이 바로 구원파적인 구원론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구원파적인 구원론이 제가 다니고 있는 대신 교단의 중대형 교회를 비롯한 대부분의 정통 장로교들과 여러 교단의 대표적인 은혜의 구원론이 되겠습니다.
저는 계시적인 사건 + 신약의 말씀을 다시 읽고 분석하면서 초대교회 사도들과 사도 바울이 가르쳤던 구원론과 현재 가르쳐지고 있는 구원론이 현저한 괴리가 있음을 여러 말씀 구절을 통하여 확인하였습니다.
위 히브리서 2장 초반의 말씀도 동일한 논리가 되겠습니다.
(2) 대체신학과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의 콜라보.
20대 초반에 IVF 선교단체 수련회를 가게되면 선교단체 소속 해외 선교사들이 초청 강사로 와서 열심히 복음을 전해주었습니다. 모두 하나님께 충성하는 좋은 분들이며 헌신된 목회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분들이 하나님께 충성하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신학교에서 대체신학을 기반으로 하여 배웠고, 구원론에 있어서도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영지주의적(구원파적) 구원론을 주장하다 보니 진리에서 어긋난 말씀 해석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도 30대 초반까지는 이렇게 알고 있었으나, 그 이후 영적인 계시적인 사건과 함께 다시 교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대체신학은 이스라엘의 회복은 없으며, 예수님의 지상재림으로 바로 새하늘과 새땅이 임한다는 주장입니다.
신성종 목사님의 "내가 본 지옥과 천국"의 내용에서도 이러한 내용이 나오는데 성경을 대체신학의 기반으로 해석하였기 때문에 영적인 체험에서도 동일하게 반추된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즉, 예수님의 지상재림의 때에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는 백보좌 심판 없이 바로 불과 유황못(게헨나)에 들어가고 동시에 사탄 마귀는 지옥의 가장 밑바닥인 바닥없는 구덩이(무저갱)에 영적인 쇠사슬에 묶여 1천년 동안 결박이 됩니다.
이것이 실체진실인데, 대체 신학에 기반하다 보니 마가의 다락방에서 시작된 성령의 이른비로 시작된 교회 시대가 바로 천년왕국이고 사탄 마귀는 이미 결박당하여 무저갱에 있으며 예수님의 지상재림의 때에 새하늘과 새땅이 임한다고 가르쳐왔던 것입니다.
성경 말씀 해석과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타임라인을 이렇게 곡해해도 되는 것인지?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탄 마귀는 현재 무저갱에 갇혀있지 않구요 !! ㅎㅎ
공중권세 잡은 자로서 세상 바벨론 통치구조를 형성하고 이제 때가 많이 되어서 자신의 계획을 실행할 멸망의 아들(THE SON OF PERDITION)을 준비시켜 놓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스가랴서에 양떼를 버린 우상목자를 허용해 놓으셨고, 다니엘서에 작은 뿔이 계시록의 짐승이며 적그리스도 입니다.
2. 세상의 조류를 거스르는 것.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의 가장 큰 명제는 신앙의 최후 승리자로서 반드시 부활체를 입어 천국을 유업으로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의 약속으로 또한 새로운 약속인 신약으로 약속한 복음은 "무상 계약(증여 계약)"이 아님을 여러번 알려드렸습니다.
(1) 부담부 증여 혹은 쌍무 계약적 성격.
IVF 선교단체를 비롯하여 장로교 합동(총신대), 장로교 통합(장신대), 장로교 대신 교단의 교회들을 다녔었고 현재 다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정통교회에서 모두 구원은 무상 계약(증여 계약)으로서 태초 이전에 하나님께서 택정하신 대로 현세에 나타난 사람들 중에서 어떤 이들은 택하시고 어떤 이들은 버리신다는 선택과 유기를 항상 얘기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서는 미워하시고 야곱은 사랑하셨다! 는 것과 여러 성경 구절을 기반으로 나타난 이론입니다.
하지만 말씀을 해석할 때에는 어떤 한 구절의 내용으로 중차대한 구원의 문제를 확정지을 수 없고, 구약과 신약의 여러 부분을 종합적이고 총제적으로 보아야 오류를 줄일 수 있고 수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IVP 출판사에서 나온 존 스토트 목사님의 여러 강해집과 유명 해외 목사님들의 신앙서적을 많이 읽었지만, 구원론에 있어서는 모두 오류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증여는 증여자가 주고싶은 사람인 수증자에게 아무런 댓가 없이 주는 것입니다. 예수 보혈의 공로의 한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 보혈의 공로를 입은 자가 지켜야할 것들이 있다는 것을 신약에서는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즉, 마땅히 성도들이 지켜야 할 새로운 은혜의 법 안에서의 부담 혹은 쌍무적 성격을 갖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수없이 관련 말씀 구절을 얘기해 드렸습니다.
(2) 강물 줄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배의 형세.
사도 바울은 성도들이 나아가야할 신앙의 푯대를 이 세상에서의 번영과 성공으로 정하기 보다는 이 세상 거대 바벨론 통치 구조와 가치관을 거슬러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믿음에서 파선( SHIPWRECKED IN THE FAITH)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과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so that we do not drift away) 주의하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서울 한강 영동대교 위를 자전거를 타고 왔다갔다 하다보면 비가 많이 와서 물살이 빠를 때는 한강이 어디로 흐르는지 알 수 있지만, 물살이 빠르지 않을 때에는 거의 정체된 것 처럼 느껴집니다. 즉 배를 타고 있다면 노를 젓지 않으면 바다로 떠내려 간다는 것입니다.